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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7월에 실제로 발생한 일이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today/article/6284675_34943.html

 

200억 식물원 기증…'영원한 속죄상'은 빼고

지난해 속칭 '아베 사죄상'으로 화제를 모았던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의 김창열 원장이 식물원 전체를 산림청에 기증했습니다. 확보한 식물 자원을 나라에서 잘 보전해 달라는 ...

imnews.imbc.com

 

'아베 사죄상'으로 화제를 모은 평창 한국자생식물원 김창열 원장이 

200억원 상당의 식물원을 대한민국 정부 산림청에 기증하면서,

그 식물원 내부에 있는 '영원한 속죄상'(속칭 '아베 사죄상'으로도 불린다)을 기증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이유는.... 바로...

국가 소유로 둬서 국가 간 대립의 부담을 지우기 보다는

사적 소유로 두고 민간 영역에서 이를 지속 시키기 위해서...

 

국가 단위에서 해야할 일과

개인 단위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간하셔서 결정한 일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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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았더라면 중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가 폐위되지 않고

문정왕후 윤씨가 권력을 잡는 일이 없어

 

파평 윤씨가 득세를 하며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쓸떼없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며 파평 윤씨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 아닐까?)

 

 

위의 이야기는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중 명종실록에 실린 이야기 이다.

 

권력을 잡고나서 얼마나 삽질 + 비위 등을 하면서 나라를 망쳐 놓았길래...

 

 

사실 이 문정왕후는 원래 왕비가 될 상황이 아니였다.

 

아래 그림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조선의 11대 왕이었던 중종에게는 총 3명의 정식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단경왕후는 중종이 왕이된지 7일만에 폐위되었고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다가 사망...

결국 문정왕후만이 살아남아서 13대 왕인 명종의 수렴청정을 하게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정왕후 윤씨는 단경왕후가 폐위되지 않거나 장경왕후가 사망하지 않았으면

명종의 수렴청정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장경왕후의 견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장경왕후야 사망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단경왕후를 폐위 시키는 일이 없었고 그래서 단경왕후가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면?

 

파평 윤씨가 세도 정치를 못하거나 또는 적당히 해먹어서

조선의 역량을 바닥내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왜, 단경왕후가 폐위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아... 연산군 때문이었구나..

 

 

그러니까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를 당한 10대 왕인 연산군의 처남의 딸이라서..

 

11대 왕인 중종의 부인으로는 적절하지 않아서 폐위 당한 것이었다.

 

 

 

결국 왕이 결정하는 시대였으니..

 

중종의 결정이 그러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게 반드시 그랬어야 할까? 

 

 

조선의 4대 왕이었던 세종대왕 또한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중종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그렇다...

 

만약 중종이 역사를 잘 알았더라면...

아니 적어도 세종대왕의 사례를 알았더라면..

(물론 세종대왕 시절에는 왕권이 엄청 강할 때였고,

 일부러 왕권 유지를 위해 주변의 강한 세력을 역모로 몰아 몰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적절한 명분과 과거의 선례를 통해 단경왕후를 폐위시키지 않고

함께 계속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12대 또는 13대 왕이 바뀌거나..

적어도 수렴첨정의 파워가 바뀌면서 조선의 역사가 달라지고

 

어쩌면... 

이 말도 안되는 일본에게 털리는 상황이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친다면...

 

적어도...

적어도..

적어도.

 

역사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바의 선례를 잘 고찰하여

내가 하는 선택이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고민하고..

어떻게 타인을 설득할 것인지 정도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늘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되는 흐름을 누군가는 끊게된다.

그 누군가는 누가 될 것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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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의당 6기 대표의 현직 국회의원 성추행 사퇴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문득 오래된 성추문 사퇴 건이 생각나서 간단히 적어본다.

(성추행과 성추문은 잘 구분해서 사용하자)

 

아마 아래 사진 한 장이면 알려나?

 

2015년 11월에 있던 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진으로 초빙된 상태에서

 

본인의 자택에서 제자들과의 술자리를 가졌는데

제자들이 최몽룡 교수의 국정 교과서 집필진 참여를 말리는 자리라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이 술자리에 언론사 기자들이 합석했다고 한다.

(어떻게 언론사 기자들이 개인 집에 까지 가서?)

 

이 자리에 합석한 기자 중 조선일보 소속의 여기자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성희롱 의혹을 인정하고 치매 등의 병증을 주장하다가 

결국 국정 교과서 집필진에서 굴욕적인 사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표정이 성희롱으로 직함이 없어진 사람 같지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으니...

 

관련 일지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 11월 4일 밤: 최 교수가 기자, 제자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낮은 수위의 섹드립을 날림.

  • 11월 5일: 최 교수,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 공개해야 한다” 발언.

  • 11월 6일 새벽 3시경: 성희롱 관련 조선일보 기사가 게재됨.

  • 11월 6일 아침 8시경: 최 교수, 날이 밝자마자 해맑은 미소로 국정교과서 집필진 사퇴 선언.

  • 11월 6일 아침: 최 교수, “군부가 교과서에 개입하면 그건 책이 아니다” 발언.

  • 이후 최 교수가 직접 조선일보에 방문해 해당 여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여 완전히 마무리.

 

최몽룡 교수, 취재기자에게 부적절한 언행

국정교과서 대표 집필진에 선정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4일 자신의 집으로 취재하러 온 조선일보 여기자 등에게 성(性)희롱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 최 교수는 이날 오

www.chosun.com

 

위와 같은 내용 때문에 최 교수와 당시 동석한 여기자가 짜고 쳤거나,

최 교수가 의도적으로 기자 앞에서 쇼를 했다는 것이 인터넷상의 정설이 되었다.

 

게다가 초기에 치매를 핑계로 국정교과서 참가를 거부했던 사람이 이후엔

정상적으로 연구 및 집필 활동을 하고 있으니,

 

처음부터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저지른 일이라는 의혹은

대중들 사이에서 100% 확정 수준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이유는, 박근혜 정부에게 찍힌 사람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과학기술계 블랙리스트 같은 각종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매장당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 나무위키

당연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인들의 반발이 매우 거세다. 물론 여기에 안 들어간 일부 문화인들의 불만(?)도 있었다 평론가인 황현산은 “만드는 사람조차 왜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namu.wiki

 

세간에 알려진 것은 최순실 게이트 이후였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

 


한 네티즌은 “역사적으로 폭군 아래에서 몸을 사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바로 병환(치매)과 추문(성적 농담)이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최몽룡 교수가 던졌던 농담도

사실 신중히 선택된 중의적인 말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사랑이 끝났다’를 한 글자로 줄이면?
          (나를 좀 편찬위에서) 빼.

 

이런 저런 썰이 많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최몽룡 교수님의 성희롱 발언에 따른 국정 교과서 집필진 사퇴는

성추문의 레전드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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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의 세번째 이야기는 옥새(玉璽) 이야기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한 완벽귀조(完璧歸趙) 사건이 있은 후에도 
진나라와 조나라 간에는 몇 번의 큰 사건이 있었으나
인상여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어갔다.
(예를 들자면 민지의 연회라던가....)

하지만 인상여가 명을 다할 무렵 
진나라 소양왕의 증손자가 진나라의 새로운 왕이되고
이 증손자가 인상여 없는 조나라를 무너뜨린 후 중국을 통일하여 진나라 시황제(첫 황제) 즉 진시황이 된다.

진시황은 통일 후 얻게된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옥벽을 가져오게 하여
再 가공을 통해 옥새(玉璽)로 만들게 한다.




이 옥새에는 ‘수명우천受命于天 기수영창旣壽永昌’ 이라는 글귀를 넣었는데..
이 글귀의 뜻은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 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작된 옥새(玉璽)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어졌는데

그렇게 된 사연은 
진시황이 동정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힐 정도의 풍랑을 만났을 때
옥새를 호수에 던졌더니 풍랑이 멈췄다고 하며
(왜 이때 옥새를 호수에 던졌는지는 모르겠다..)

몇 년 후에 그 옥새가 다시 어부가 건져서 진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진시황은 옥새가 자신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로 여겼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옥새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에이 사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에서는 옥새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이 100으로 오른다)

이 옥새는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 전국을 거쳐 한나라, 위촉오의삼국지를 거치고
다시 위진남북조, 수 및 당나라 까지 전달되는데….

우선 여기까지가 옥새 이야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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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의 두번째 이야기는 완벽(完璧)과 하자(瑕疵)이다.

이 화씨지벽 스토리에 언급된 옥벽은 
나중에 조나라로 넘어가게 되어 조나라 혜문왕이 소유하게 된다.

이 옥벽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진나라의 소양왕 진나라의 15개 성과 옥벽과 바꾸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진나라의 군사력이 조나라 보다 월등히 높았으므로 
당연히 조나라 혜문왕은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되었고
혜문왕의 신하 중 한 명인 인상여라는 사람(문경지교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 후기 인물)은
자기가 옥벽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다는 ‘완벽귀조(완전한 옥벽 상태로 조나라로 돌아오다) 라는 다짐을 하게되고

이 ‘완벽귀조(完璧歸趙)’ 라는 말에서 완벽(完璧)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아무튼 이 인상여는 조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진나라 소양왕에게 옥벽을 바치고 
15개의 성을 불하하는 문서를 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진나라 소양왕은 15개의 성을 조나라에 줄 생각이 없어서 인상여의 말을 무시하고 옥벽만 감상한다.
(애초에 15개 성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만든 협박이었으니)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인상여의 요청이 묵살되자 

인상여는 꾀를 내어 진나라 소양왕에게
 옥벽은 한 눈에 보기에는 완벽하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흠집(흠집 하 瑕 라는 글자를 쓴다)이 있는데 
자신이 직접 왕에게 어디있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여

잠시 옥벽을 돌려받게 되고,
옥벽을 돌려받은 인상여는 받자마자 옥벽을 높이 들며 15개의 성을 준다는 문서를 먼저 내놓지 않으면
옥벽을 깨트리고 자기도 죽겠다고 협박을 한다.
여기서 하자(흠집/티 瑕, 흠집 疵)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에 진나라 소양왕은 그를 달래고자 15개 성을 주겠다고 하자

5일 간의 시간을 갖고 문서를 작성해서 달라고 하며 시간을 벌고
그 날로 사람을 시켜 옥벽을 조나라로 보내버린다.

5일 후에 옥벽이 이미 조나라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진나라 소양왕은 인상여를 죽이려고하나

이런 담이 크고 천재적인 딜을 한 인재를 죽이면 
세상 사람들의 신임을 잃게 된다는 신하들의 제안에
인상여를 더 달래서 조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명나라 시대의 왕세정이라는 사람은
인상여완벽귀조론 이라는 글을 써서 인상여를 칭송하였고
이 글에서 ‘완벽(完璧)’과 ‘하자(瑕疵)’라는 말의 의미가 확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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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이란 화(和)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바친 벽(둥근 옥 璧)을 이야기 하며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의 의미로 쓰인다.
(참고로 이 화씨지벽 이야기는 한비자 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임)

변화(卞和, 이름이 변화라는게 아니고 ‘卞’ 지역에 살던 ‘和’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라는 사람이
산에서 옥의 원석을 발견하고는 초나라의 왕(초여왕)에게 바쳤는데

당시의 감정사가 옥의 원석 상태를 보고 이게 좋은 옥이 아니고 보통 돌이라고 감정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초여왕 역시 이 옥 원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채 
화가 나서 변화의 한 쪽 발목을 잘라버리는 형벌을 내린다.

당연히 변화는 매우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초여왕이 죽고 초무왕이 새로운 초나라 왕이 되었다.

그래서 변화는 다시 초무왕에게 옥의 원석을 바쳤는데, 
초무왕도 그 옥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보통 돌을 상납하고 
벼슬이나 돈을 받으려는 시도로 판단하여 

초무왕은 변화의 남은 한 쪽 발목을 잘라버리는 형벌을 내린다.

그렇게 변화는 좋은 옥을 진상하려다가 
양쪽 발목이 다 잘린 채로 혼자 산속에 장애인으로 살았다.

시간이 더 흘러 초무왕이 죽고 초문왕이 등급하자
변화는 다시 옥의 원석을 초문왕에게 바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그의 양 발목은 끊어져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변화는 억울함에 계속 울었고 나중에는 눈에서 피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이 변화에게 왜 우냐고 물었더니

나는 발이 잘려서 우는 게 아니다. 
보옥이 돌이 되고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쟁이 취급받는 것이 슬퍼서 운다고 이야기 했다.

이런 변화의 괴이한 행동과 피눈물은 소문을 타게 되었고
초문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초문왕은 그 옥의 원석을 가져오게 하여 최고의 감정사에게 정밀 감정을 시킨다.

그렇게 정밀 감정 결과  옥은 엄청난 보물임이 밝혀지게 되어 
초문왕은 이것을 아름다운 옥벽(납작한 원형 모양의 장식품)로 가공하여 소유하였고


 

같은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옥벽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초문왕은 변화에게 평생 편하게 살수 있는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이 옥벽은 뭔가 특이했다고 하는데 여름에 시원하고 해충이 범접하지 못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이 이야기는 한비자를 쓴 한비가 작성하여 
진시황에게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말로 설명해 주었는데
진시황은 한비의 숨은 뜻을 파악하고 바로 한비를 등용하게 된다.
(결국 자기가 숨은 옥의 원석이니 빨리 등용하라는 뜻)

여기까지가 화씨지벽(和氏之璧)의 시작이야기 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이 화씨지벽을 얻게되고 

 이것을 다시 옥새로 가공하여 황제의 징표로 삼아... 

 현대 중국 공산당 스토리에서 까지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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