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라오는 중국 사천(쓰촨)성에서 시작한 훠궈 프랜차이즈인데

현재는 한국에도 그 지점이 꽤 있다. 

 

간단히 검색해보면 명동, 대학로, 건대, 홍대, 서초, 영등포, 부산역 등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부분 새벽 5시까지 영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방문 고객이 늦은 시각까지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하이디라오를 방문할 때는 

'캐치테이블' 이라는 어플을 이용해서 사전에 대기를 걸어놓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가격은... 생각보다 사악한 편인데 중국 대비 거의 1.5~2배 정도 비싼 것 같다.

그러니까, 남자 2명이서 맘껏 먹는다면 대략 15만원 정도 나올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을 참고하자)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 새벽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침공은 미사일로 키예프(우크라이나 수도) 및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지상군이 진입하며 시작되었다.

 

 

위와 같이 주요는 러시아 지역인 B에서 진입, 벨라루스 지역인 A에서 진입

지난 2014년 러시아가 강제로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반도인 C에서 진입하는 등

 

서쪽의 폴란드, 몰도바 등을 제외한 북, 동, 남 모든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왜 발생한 것일까?

(어떤 분들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건 어떤 면에서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는 상황에서 자구책으로 손을 휘저으며 방어하는데

 이때 폭력이 시작되니 마치 손을 휘저은 것 때문에 폭력이 시작된 것처럼 오해하는 면이 있다.)

 

 

이 전쟁은 직접적으로는 2021년부터 계속되온 우크라이나 위기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더 깊이 보자면 러시아의 소련 재건을 위한 확장 정책이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2022년 초 전쟁 직전의 우크라이나 및 주변 국가 상황인데

어떻게 보면 이미 2021년 말 부터 러시아는 위와 같은 병력 동원과 동시에
하이브리드 워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 우크라이나 정부 웹사이트가 해킹 공격을 받아 7개 부처 웹사이트가 동시에 마비되고

온라인 상에 반 우크라이나 정부 루머가 유포되거나, 우크라이나 내부 쿠데타 등이 기획되는 등

러시아가 추진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 체제 전복 시도 움직임이 있었다.

(사실 하이브리드 전쟁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활동이기도 하다)

 

내부 쿠데타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직접 입수한 정보라며

서방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었고,

실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 관계자들이 우크라이나 최고 갑부인 리나트 아흐메토프의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쿠데타 계획 논의 음성파일을 정보 기관이 입수했다는 내용도 있다.

 

 

위와 같은 2021년 우크라이나 위기는 한단계 앞에서 보면

2013년 11월 21일에 발생한 유로마이단(Euromaidan) 시위이고

- 사실 이 유로마이단 시위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러시아에 경제적 복속 당하는 상황을 피하게 되었고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유로마이단에서 시작된 시위가 친러 정권을 몰아내고

우크라이나 민주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는데

러시아는 이러한 우크라이나에게 다양한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했고

- 러시아는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부터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키에프 정부라고 부르는 등 이미 반 우크라이나 감정을 표출하고 있음 

- 러시아의 사주를 받은 우크라이나 내 친러파 일당은 이른바 분리주의자로 활동하기 시작

- 돈바스 전쟁 등 우크라이나 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반군을 지원

 

우크라이나는 어쩔 수 없이 더욱 반 러시아 성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자구책으로 EU 회원국 가입이나 NATO 가입 등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EU 가입, NATO 가입 추진 등은 우크라이나가 자발적 시작한 것이 아니고

러시아가 재건하려고 하는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 구성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자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자위적 차원에서 EU와 NATO에 가입을 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력 확대 과정에서 위와 같은 반발을 다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서방 유럽국가 들이 하는 행태가.... 아래와 같다.

- 이러니 전쟁이 날 수 밖에...

 

 

 

우크라이나는 남한의 6배 면적의 대부분 비옥한 평원의 대규모 농업 생산지이고

흑해와도 연결되어 있어 러시아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병합하고 싶을 것이다.

(한때 전 세계 곡물 수출량 3위를 달성하기도 한 잠재력 있는 국가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1932년~1933년 사이

과거 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대기근을 겪으며 약 300만명 이상의 국민이 아사하였고

(아니 곡물 수출량 3위 달성 가능한 국가에서 대기근/아사 라니...)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러시아에게 수탈당하며 반러 감정이 커져왔다.

- 다시 러시아 영향권으로 들어가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을까?

- 어떻게 보면 한/일 관계 비슷하기도 하다.
  (일본이 강점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을 괴롭히는 상황) 
  친일파를 이용하여 한국 정치 등에 지속적으로 영향력 행사

 

이러한 상황이니... 우크라이나는 쉽게 러시아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 뻔히 보인다.

 

그러면 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의 향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미국과 서방 유럽국가들이 어떻게 할까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세계 2차 대전은 히틀러가 폴란드 등 동쪽 유럽 국가를 침공 했을때

영국, 프랑스 등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묵인하면서 확대된 세계 전쟁이다.

 

러시아가 과연 우크라이나 하나로 만족할까?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은 과거 역사에서 더 배운 것이 없을까?

 

위에 대한 상식적 판단이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을 어떻게 봐야할지 보여준다.

 

향후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1.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공략할 것이고, 우크라이나는 계속 저항할 것이다.

   (슬로베키아, 루마니아 등 주변 국가는 함께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므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많은 지원을 할 것이다.)

 

    2-1. 이 경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인종학살 수준으로 죽일 수도 있다.

 

    2-2. 또는 서방 국가들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협상이 진행될 수도 있고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분단 국가가 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거부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새로운 내전이 시작될 수도...)

   

    2-3. 또는 러시아가 다른 원인으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을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2021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속적으로 위험이 상존하는... 죽은 사람만 불쌍한...)

 

3. 만약 2번 단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갖게 된다면,

   지속적인 확장 정책을 펼 것인데 그 다음은 발트 3국 등이 타겟이 될 수도 있다.

 

4. 그리고 결국 확장된 러시아는 서방 유럽 국가와 다시 대결하는 상황이 될 것이고

   이때 우리는 또다른 더 큰 전쟁에 대한 위협과 신 냉전 시대를 겪어야 할 것이다.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서방 유럽 국가와 미국이 진입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알았더라면 중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가 폐위되지 않고

문정왕후 윤씨가 권력을 잡는 일이 없어

 

파평 윤씨가 득세를 하며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쓸떼없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며 파평 윤씨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 아닐까?)

 

 

위의 이야기는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중 명종실록에 실린 이야기 이다.

 

권력을 잡고나서 얼마나 삽질 + 비위 등을 하면서 나라를 망쳐 놓았길래...

 

 

사실 이 문정왕후는 원래 왕비가 될 상황이 아니였다.

 

아래 그림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조선의 11대 왕이었던 중종에게는 총 3명의 정식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단경왕후는 중종이 왕이된지 7일만에 폐위되었고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다가 사망...

결국 문정왕후만이 살아남아서 13대 왕인 명종의 수렴청정을 하게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정왕후 윤씨는 단경왕후가 폐위되지 않거나 장경왕후가 사망하지 않았으면

명종의 수렴청정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장경왕후의 견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장경왕후야 사망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단경왕후를 폐위 시키는 일이 없었고 그래서 단경왕후가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면?

 

파평 윤씨가 세도 정치를 못하거나 또는 적당히 해먹어서

조선의 역량을 바닥내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왜, 단경왕후가 폐위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아... 연산군 때문이었구나..

 

 

그러니까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를 당한 10대 왕인 연산군의 처남의 딸이라서..

 

11대 왕인 중종의 부인으로는 적절하지 않아서 폐위 당한 것이었다.

 

 

 

결국 왕이 결정하는 시대였으니..

 

중종의 결정이 그러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게 반드시 그랬어야 할까? 

 

 

조선의 4대 왕이었던 세종대왕 또한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중종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그렇다...

 

만약 중종이 역사를 잘 알았더라면...

아니 적어도 세종대왕의 사례를 알았더라면..

(물론 세종대왕 시절에는 왕권이 엄청 강할 때였고,

 일부러 왕권 유지를 위해 주변의 강한 세력을 역모로 몰아 몰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적절한 명분과 과거의 선례를 통해 단경왕후를 폐위시키지 않고

함께 계속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12대 또는 13대 왕이 바뀌거나..

적어도 수렴첨정의 파워가 바뀌면서 조선의 역사가 달라지고

 

어쩌면... 

이 말도 안되는 일본에게 털리는 상황이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친다면...

 

적어도...

적어도..

적어도.

 

역사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바의 선례를 잘 고찰하여

내가 하는 선택이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고민하고..

어떻게 타인을 설득할 것인지 정도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늘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되는 흐름을 누군가는 끊게된다.

그 누군가는 누가 될 것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2021년 3월 1일

 

오늘은 3.1절 102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같은 날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많은 고생을 하셨던 분들을 기리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특히 3.1절 하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한 한국인협회가 독일의 한 AI 업체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재현한 결과물을 내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 사이트에 가보니 과거의 사진을 기반으로

해리포터 영화에서 나올 법한 움직이는 사진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www.myheritage.co.kr/deep-nostalgia

 

MyHeritage Deep Nostalgia™, deep learning technology to animate the faces in still family photos - MyHeritage

 

www.myheritage.co.kr

 

 

 

유관순 열사에 대한 움직이는 사진 결과물은 아래와 같았다.

 

 

 

 

그리고... 모진 고문에 부은 얼굴을 보정한 사진...

 

 

 

 

 

최근 정의당 6기 대표의 현직 국회의원 성추행 사퇴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문득 오래된 성추문 사퇴 건이 생각나서 간단히 적어본다.

(성추행과 성추문은 잘 구분해서 사용하자)

 

아마 아래 사진 한 장이면 알려나?

 

2015년 11월에 있던 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진으로 초빙된 상태에서

 

본인의 자택에서 제자들과의 술자리를 가졌는데

제자들이 최몽룡 교수의 국정 교과서 집필진 참여를 말리는 자리라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이 술자리에 언론사 기자들이 합석했다고 한다.

(어떻게 언론사 기자들이 개인 집에 까지 가서?)

 

이 자리에 합석한 기자 중 조선일보 소속의 여기자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성희롱 의혹을 인정하고 치매 등의 병증을 주장하다가 

결국 국정 교과서 집필진에서 굴욕적인 사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표정이 성희롱으로 직함이 없어진 사람 같지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으니...

 

관련 일지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 11월 4일 밤: 최 교수가 기자, 제자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낮은 수위의 섹드립을 날림.

  • 11월 5일: 최 교수,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 공개해야 한다” 발언.

  • 11월 6일 새벽 3시경: 성희롱 관련 조선일보 기사가 게재됨.

  • 11월 6일 아침 8시경: 최 교수, 날이 밝자마자 해맑은 미소로 국정교과서 집필진 사퇴 선언.

  • 11월 6일 아침: 최 교수, “군부가 교과서에 개입하면 그건 책이 아니다” 발언.

  • 이후 최 교수가 직접 조선일보에 방문해 해당 여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여 완전히 마무리.

 

최몽룡 교수, 취재기자에게 부적절한 언행

국정교과서 대표 집필진에 선정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4일 자신의 집으로 취재하러 온 조선일보 여기자 등에게 성(性)희롱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 최 교수는 이날 오

www.chosun.com

 

위와 같은 내용 때문에 최 교수와 당시 동석한 여기자가 짜고 쳤거나,

최 교수가 의도적으로 기자 앞에서 쇼를 했다는 것이 인터넷상의 정설이 되었다.

 

게다가 초기에 치매를 핑계로 국정교과서 참가를 거부했던 사람이 이후엔

정상적으로 연구 및 집필 활동을 하고 있으니,

 

처음부터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저지른 일이라는 의혹은

대중들 사이에서 100% 확정 수준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이유는, 박근혜 정부에게 찍힌 사람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과학기술계 블랙리스트 같은 각종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매장당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 나무위키

당연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인들의 반발이 매우 거세다. 물론 여기에 안 들어간 일부 문화인들의 불만(?)도 있었다 평론가인 황현산은 “만드는 사람조차 왜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namu.wiki

 

세간에 알려진 것은 최순실 게이트 이후였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

 


한 네티즌은 “역사적으로 폭군 아래에서 몸을 사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바로 병환(치매)과 추문(성적 농담)이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최몽룡 교수가 던졌던 농담도

사실 신중히 선택된 중의적인 말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사랑이 끝났다’를 한 글자로 줄이면?
          (나를 좀 편찬위에서) 빼.

 

이런 저런 썰이 많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최몽룡 교수님의 성희롱 발언에 따른 국정 교과서 집필진 사퇴는

성추문의 레전드가 된 것 같다.

 

앞선 글에서 대한민국 반도에 어떻게 커피가 도입되어 확산되어 왔는지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했다.

(the-investor.tistory.com/56)

 

고종이 마셨던 커피는 드립(Drip) 커피였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를 선호하게 된 후

60~70년대 커피 두 스푼, 프림 한 스푼, 설탕 한 스푼의 다방 커피가 트렌드를 잡았고 

 

80년대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판기와 대량 생산된 액상 커피가 나오면서

어느 순간 자판기 커피와 캔커피의 천국이 되었다.

 

90년대부터는 나이스데이, 네스카페 등 커피 전문점 들도 

대기업 중심으로 진입했다가 철수하는 스토리가 있었고

90년대 말에는 아예 스타벅스가 들어오며 현재의 대한민국 커피계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드립 커피의 한국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흔히 커피계에는 일(1)서 쓰리(3)박이라고 서씨 한 명과 박씨 세 명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후 인스턴트 커피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이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일본식 커피를 소개한 분들이라고나 할까?

   

     (사실 일제시대에도 드립커피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명맥이 끊기고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를 계기로

      인스턴트 커피를 즐기던 것이 다시 드립커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일 서는 1980년대에 활동했던 서정달 선생이고 

 

쓰리 박은 과거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1990년대 부터

한국의 커피계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세 명인

박원준 선생, 박상홍 선생, 박이추 선생을 지칭한다.

 

 

먼저, 서정달 선생(작고)은 1980년대 명동 미도파 백화점(현재 롯데 영플라자 자리)에 있는

커피샵에서 융드립으로 명성이 높았었다.

 

다만, 이 분은 따로 자신의 블랜딩이나 로스팅, 드립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지 않아

돌아가신 이후 과거와 같은 융드립 커피의 맛을 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3755449 기사 일부 발췌

 

 

박원준(작고), 박상홍(미국 거주), 박이추(강릉 거주)의 세 분 중

 

박원준 선생은 이화여대 앞에서 '다도원'을 운영하며 고노 드립 등으로 유명했으나

2008년 작고하시며 더 이상 명맥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박상홍 선생오사카 출신으로 일본 곳곳의 커피 맛본 후 한국에 왔는데

마도로스 박이라는 별명이 그를 소개하듯

약 6년 간 배를 타고 많은 곳을 여행하며 커피 맛을 보고 연구하였으나

이제는 미국에 정착한 관계로

한국에서 그의 커피 맛을 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15년 카페 뮤제오(caffemuseo.co.kr)와 인터뷰 당시

 

 

박이추 선생은 일본 국적 교포에서 1990년대 한국으로 귀화하신 분으로

도쿄의 '깃샤텐'이라는 학원에서 커피를 배워서 한국으로 왔다고 하는데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이 분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때 훗카이도 지역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일을 배우고

한국에 와서 협동 농장 방식을 적용하려다가 목장 땅 소유권 분쟁 등으로 결국 목장일을 포기하고

여행차 갔었던 도쿄에서 우연히 커피를 접하고 그 향에 반해 

깃샤텐이라는 커피 학원에 등록하고 시작한 것이 바로 개인적인 커피 경험의 시작이고

 

1988년 혜화동 로터리(현재 엘빈 자리)에 가배 보헤미안을 오픈 한 것이 

한국에서의 커피 커리어 시작이다.

 

    (이때부터 서정달 선생, 박원준 선생, 박상홍 선생, 박이추 선생이 모임을 갖고
     커피에 대한 지식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 서, 쓰리 박이라는 말이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90년대 초에 고려대가 있는 안암동에 인터네셔널 보헤미안을 이전 오픈하고

다시 강릉 연곡면에 추가 샵을 오픈하게 되면서 현재의 강릉 커피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아직도 안암동에는 보헤미안이 남아있다.)

 

    (혜화동에서 안암동으로 옮긴 이유가 당시 데모가 잦고 격렬하여
     최루탄 영향이 너무 많아 영업이 쉽지 않아서인데,

     안암동으로 옮기고 나니 커피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시 2004년 강릉 연곡면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안암동 보헤미안 시절,

그곳을 자주 찾던 교수가 단국대 사회교육원 커피 전문가 과정을 만들겠다고

그에게 상담을 받고 간 것이 2000년 2학기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서 지도교수를 하게되고

이 인연으로 단국대 서울 캠퍼스 지도교수,

 

2003년 부터는 강릉 원주대에서 바리스타 양성 과정을 지도하게 된다.

 

이제는 과거 일 서, 쓰리 박 중 막내로서(이제 80대 이신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강릉 지역에서 커피 나무를 키울 수 있는 보헤미안 매장을 추가 확보하고

서울 지역으로도 추가 매장을 상암동 지역에 오픈하였을 뿐 아니라

 

2016년 라오스 지역에 커피 농장 약 6,000평을 매입하며 커피 관련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커피 나무 심은 지 3년 후부터 수확이 가능하다고 하니 아마 20년부터는 여기 커피를 만날 수 있을 듯)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아마 아관파천 기간인 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맛본 내용 으로 알고 있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에서 1897년 2월 기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이야기 하는데

 이때 친일 내각이 해체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되는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아직도 서울 중구 정동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관련된 커피의 스토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종의 날조로서

1886년 당시 조선의 관료였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 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고종이 최초로 커피 맛을 본 조선인 같은 것은 아니고  

 

1884년 3월 27일 자 '한성순보(1883년 창간)'에 커피를 언급한 내용이 있고

('이탈리아 정부는 시험 삼아 차와 가배를 시칠리아 섬에 심었다'는 내용)

초대 주한 영국영사를 지냈던 윌리엄 칼스의 저서(Life in Corea, 1888년 출간)에도

'1884년 5월 조선에 부임하면서 숙박 시설이 없어 조선 세관 책임자인 묄렌도르프 집에서 묵었는데

뜨거운 커피가 제공되 고마웠다' 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1880년대 커피는 이미 조선에서 서양 근대화의 상징이었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하는 하나의 콘텐츠 였고

당연히 고종은 아관파천 전에 이미 커피를 접해서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커피는 '서양의 검고 쓴 맛이 나는 한약 탕국'이라는 뜻에서 '양탕국(洋汤)'으로 불렸고, 가배차/가비차 이렇게도 불렸는데 이는 중국어 咖啡(KaFei, 한국식 독음은 가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에는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자리에 설립되었던 손탁호텔 1층의 정동구락부에

한국 최초의 대중 커피숍이 오픈하였으나 너무 비싼 가격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었으나

입소문을 타고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동아 일보에서는 1920년~1930년대에 '카피(커피)의 효력'이나 
'카피(커피)차 끓이는 법' 등의 커피 관련 기사를 내기도 했었다.

 

 

1945년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으나 혼란한 시기라 커피 문화의 발달은 쉽지 않았고

1950년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들어온

미군의 군용 야전식량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가 소개되었고

 

미국의 씨레이션, 식사류 외 설탕/소금 그리고 담배와 껌 등이 함께 들어있고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에 인스턴트 커피가 있다.

 

이 인스턴트 커피는 당시 명동 일대에서 성황리에 운영되었던

'마돈나', '모나리자', '플라워' 등에서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커피는 경제 개발의 과정에서 외화 낭비의 주범으로 몰렸지만

오히려 청년 층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외화 반출 통제, 세수 확보 등 목적으로

한국 국적의 커피 업체 설립을 인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1968년 5월 동서커피가 인천 부평에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동서커피가 한국 업체 최초로 인스턴트 커피를 개발하고

    심지어 1976년 12월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다)

   - 참고로 동서커피는 Kraft Foods와 (주)동서가 50%/50% 지분으로 설립한 JV

 

1970년대에는 음악 전문 다방이 유행하며 비싼 커피의 소비처가 되었으나

1980년대 들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판기 커피가 본격 도입되면서

동서식품과 네슬레 인스턴트 커피 제품이 경쟁을 크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점점 더 커피의 대중 접점이 넓어지며 수요가 확대되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1990년 1월 대상(과거 업체명 미원)이 '나이스데이'라는 커피전문점 1호를 내면서

기업형 커피전문점이 활성화 되었고

한편으로는 맥스웰/레쓰비/네스카페 등이 캔커피 시장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1999년 커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1999년 7월 이화여대 근처에 스타벅스 1호점이 오픈한 것이다.

 

 

이 스타벅스의 출현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거나

마시지는 않더라도 인지는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의 세번째 이야기는 옥새(玉璽) 이야기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한 완벽귀조(完璧歸趙) 사건이 있은 후에도 
진나라와 조나라 간에는 몇 번의 큰 사건이 있었으나
인상여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어갔다.
(예를 들자면 민지의 연회라던가....)

하지만 인상여가 명을 다할 무렵 
진나라 소양왕의 증손자가 진나라의 새로운 왕이되고
이 증손자가 인상여 없는 조나라를 무너뜨린 후 중국을 통일하여 진나라 시황제(첫 황제) 즉 진시황이 된다.

진시황은 통일 후 얻게된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옥벽을 가져오게 하여
再 가공을 통해 옥새(玉璽)로 만들게 한다.




이 옥새에는 ‘수명우천受命于天 기수영창旣壽永昌’ 이라는 글귀를 넣었는데..
이 글귀의 뜻은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 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작된 옥새(玉璽)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어졌는데

그렇게 된 사연은 
진시황이 동정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힐 정도의 풍랑을 만났을 때
옥새를 호수에 던졌더니 풍랑이 멈췄다고 하며
(왜 이때 옥새를 호수에 던졌는지는 모르겠다..)

몇 년 후에 그 옥새가 다시 어부가 건져서 진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진시황은 옥새가 자신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로 여겼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옥새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에이 사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에서는 옥새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이 100으로 오른다)

이 옥새는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 전국을 거쳐 한나라, 위촉오의삼국지를 거치고
다시 위진남북조, 수 및 당나라 까지 전달되는데….

우선 여기까지가 옥새 이야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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